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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식 작은집 - 3. 본문

유아인/1일 1작은집

엄홍식 작은집 - 3.

LSGO 2016. 4. 25. 00:11

3.


2009.09.02 05:03



"쌀쌀해."

 라는 말을 생각 보다 더 일찍 꺼내 입었다. 시커먼 팔꿈치가 훤히 드러나는 반팔 티셔츠 위로.

집에 오자마자 드레스룸에 들어가 널부러진 빨래더미를 대충 수습하고 옷장 문을 죄다 열어젖힌다. 매년 하는 생각. '지난 해 열성으로 사모았던 옷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올 봄에 입었던 가디건의 먼지를 털어내고, 세일때 사두었던 자켓을 걸쳐본다.


 밤이면 제법 쓸쓸한 바람이 불고 이 여름, 에어콘 아래에서 다 쏟아내지 못 한 땀방울이 무안하리 만큼 가을은. 엉겁결에 덮쳐올 것이다.


 3,4,5월은 봄. 6,7,8월은 여름. 9,10,11월은 가을. 나머지는 겨울. 어릴때 나는 그런줄로 알았다. 반팔은 여름. 긴팔은 겨울. 그 두가지가 모두 활보하는 날은 봄이나 가을. 그렇게도 알았다. 그렇게 모든게 정해져 있는줄로 알았다. 더 나이가 들어서는 누군가 그 초록색 창가에 앉아 "이제 제법 가을 냄새가 나네."라고 했고, 그 후로 나는 세개의 가을을 더 그 처량맞은 목소리로 맞이했다.

 9월. 가을이다. 반팔들. 아직이다. "이제 제법 가을 냄새가 나네." 살짝 열린 문들 사이로 좀처럼 하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옷장문을 열고 가을을 꺼낸다. 식초와 참기름이 섞인것 같은. 시큼하고 고소한 냄새가 담배향과 섞여 말끔히 세탁된 자켓 위로 덕지덕지 눌어붙는다.


 대구의 앞산이란 곳 아랫자락에 살 때. 나는 자주 등산을 다녔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산이란 곳의 귀퉁이도 밟지 않았지만 그때는 그것이 일상이었고, 가뿐했다. 거기의 실제 지명이 앞산이다. 작은 골짜기를 구석구석 품은 내 집 앞의 앞산. 엄마와 그 또래의 중년 여자들 사이에 끼어 얼음물에서 막 건진 오이를 뜯으며 뒷걸음로 그 산을 올랐다. 사뿐사뿐. 용감하게도.


 그리고 여기. 여기에서 나는 여전히 뒤집힌채로 시간을 걷고 있다. 내가 걸어온 시간만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오로지 거기에서만 치열한 삶의 가치가 성립되리라. 앞날을 등진채. 앞날로 향한다. 미래나 꿈이나 그런 말들은 가증스러우며 연약한 자위라 여겨 죽어도 뒤돌아 앞을 보지 않는다. 꿈이란걸 꾸기에는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고, 삶의 목적을 찾기엔 종착지가 죽음이라 허무하기 짝이없다. 그것을 위해 산 적은 없지만 죽음은 끝일것 같은 저기 언덕 너머로 변함없이 나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내가 등진 곳 어디쯤에서 엉겁결에 덮쳐오겠지. 오늘처럼.

 그것에도 냄새가 있다면 옷장을 열리라. 가을을 준비하러.


 그렇게 살고 있다. 오이를 뜯으며 앞산을 뒤로 오르던 철 없어 용감하던 어린아이로. 이제는 그것밖에 할 수 없는 편협한, 그리고 여전한 앞산 어느 자락의 철 없는 어린아이로.


 모순과 고통의 계절이다.






앞산 - 대구 남구에 있음.


앞산이라고 불리는 앞산이 많은가봄..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래도 전화번호도 있는건 대구뿐이야..!ㅋㅋㅋㅋㅋㅋㅋ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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