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Chocolate

엄홍식 작은집 - 2. 본문

유아인/1일 1작은집

엄홍식 작은집 - 2.

LSGO 2016. 4. 24. 13:10

2.


2009.03.21 20:03


 조카에게 전해줄 운동화 두 켤레를 몇일째 가방에 쑤셔넣고 다니다 굳이 폭우가 쏟아지는 날을 잡아 큰 누나의 2년된 신혼집을 찾았다. 누나가 처음으로 남자친구를 집에 데려왔을때 부터 나는 그녀의 신혼집을 상상해왔다. 구석구석 아이의 장난감들이 널부러져있고, 티 테이블엔 다소곳한 표지의 가계부가 정갈하게 덮여있는 김치찌개 냄새로 가득한 집. 그녀 집의 풍경은 나의 상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훨씬 더 평온했고, 두터웠다.


 아이방엔 유행한다는 무슨 브랜드의 침대가 솟아있고, 벽에는 영어 스팰링이 도배되어있고, 책장은 내 집 거실의 그것보다 더 큰것같았다. 조카는 이제 막 돌을 지났다.

 "유난떨지마, 좋은 음악이나 골라서 들려줘"

나는 한심하다는듯 잔소리를 던져놓고 그 방 문을 닫는다. 아주 쎄게, '쿵'소리가 나도록.




 학창시절. 이유없이 학교에 와서 이유없이 교과서를 펼치고 이유없이 날이 선 선생님의 늘어진 테이프같은 목소리를 듣는것은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이었다. 이유없이 해야할 일들로 가득했던 그때에 나는 영리하지 못하고 예민하기만 한 보통아이의 사춘기를 겪고 있었고 나도 모르게 엎질러진 모든 현상의 이유를 찾고있었다. 내 발로 걸어 왔다면 그것은 행동이지만 나도 모르게 떠밀려 왔다면 그것은 현상이다. 그때 내겐 그랬다.

 여름, 모기의 등장 처럼 나의 등장 또한 섭리대로 이루어졌다. 존재의 이유를 가뿐히 자연에게서 찾은 다음, 나는 내 행동들의 이유를 찾아야했다. 학교에 가는일. 그때는 그것이 가장 중대한 일이었으니 우선은 그 학교.

 매일 아침 정시에 일어나 전날 밤까지 씨름한 수행평가 프린트를 거북이 등딱지 같은 가방에 쑤셔 넣고 계단을 내려와 치킨집을 지나고 부동산을 지나 슬러쉬 기계가 돌아가는 문방구를 지나 선도부의 위압적인 눈빛을 무사히 뚫고 지나 책상 위에 엎어지던 나. 조잘대는 소리. 짧아진 교복들. 하도 문질러서 촌스런 광택이 나는 엉덩이. 흙때가 끼어있는 지저분하고 길다란 손톱들. 나도 거기에 썩 잘 어울리는 평범한 아이들중 하나였다. 품위없고, 불쾌한 냄새가 나는.


 고등학교 진학과 전학을 거칠때 까지 헤매이던 나는 더 이상 이유가 필요없었다. 나는 선택과 행동이 주는 자의식의 성장을 알아가던 참이었다. 오래가지 않아 학교를 그만두었다. 물론, 그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유가 없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겠지만 더이상 학교를 가지 않고도 나는 충분히 폭력적 이었고 잔인했다.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남들보다 일찍 마쳤다. 나는 이유를 찾는게 아니라 이유가 없이 벌어지는 모든 현상들을 하나씩 끊어내는 일에 매진했다. 나는 모순적이었고, 영악해졌다. 모든 것에 썩 잘 어울리는 이유를 갖다 붙이고, 과감하게 버려나갔다. 학교와 친구와 나를. 억지스럽게.


 혹은. 더 오래 전.

 나방은 무섭고 나비는 예쁘것이라고 분간할 능력이 생겼을때쯤. -나는 숫자로 되어있는 모든 것을 잘 잊어버리는 편이다- 나는, 장판 한쪽이 검게 그을린 허름한 시골 한옥집에 누워있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다. 이상하게 버튼이 큰 빨간색 전화기. 애타는 손으로 엄마에게 삐삐를 치고 나서 나는 공포를 알았다. 나는 그 집의 전화 번호를 알지 못했다. '연락 받을 전화번호를 입력하세요'라는 식의 메세지가 흘러나왔겠지.

 그 무렵 아빠의 사업이 부도를 맞았고, 나는 매일 아침 엄마의 손을 잡고 빚쟁이들이 줄은 선 아파트 복도를 지나 얼마 전 입학한 초등학교엘 갔다. 그리고 시골집, 아빠가 도망쳐있던 곳. 그때까지는 빨간 딱지가 붙지 않은 엄마의 승용차를 타고 그 시골집으로 하교하는 일이 잦았다. 엄마는 그곳에 있는걸 훨씬 편안해했고, 그곳에서 자는 일이 많았다. 언제부터는 학교엘 가지 않아도 됐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와 아빠가 실종된 것이다. 내가 버려진 건가. 무튼, 공포 뒤에 찾아온 것은 선택이었다. 나는 그것을 두려워 했는지도 모른다. 엄마가 무언가를 선택해 주지 않는 상태. 나는 길지 않게 숨을 고르고 나의 선택대로 벌레를 잡으러 다니거나 버려진 비닐 하우스에서 흙장난을 치거나 집 뒤로 나있는 산길을 타고 비석도 없는 무덤가에서 추위를 견딜 궁리를 하고 있었다. 해질 무렵 그곳에서 엄마의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한참 뒤에야 집으로 내려갔다. 나는 그 시간을 만씩하고 있었다.




 누나는 거실에 앉아 아파트 시세며 얼마전에 있었던 아이의 돌잔치며 관심없는 이야기들을 늦게까지 늘어 놓는다. 누나, 내 부모의 큰 딸. 그들의 여전한 어린아이. 그녀는 자신의 딸이자 나의 조카인 아기가 커서 학교엘 가고 나의 세대보다 한참은 더 빠르게 대가리에 피가말라 개똥 철학을 늘어놓으며 자신이 누구인지, 왜 왔는지, 왜 살아야하는지를 물어올 날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어야할 것이다. 생각보다 더 일찍. 그리고 깨닫겠지, 보내줘야 한다고. 선택 할 수 있도록. 아무것도 모르는 초라한 엄마인채.


 여름의 끝자락, 나는 모기처럼 퇴장할 것이다. 지난 여름 사라저간 모기처럼. 오래된 겨울, 가득히 쏟아지던 눈발 처럼. 어느 시대에 벌어진 작고 초라한 한가지 현상으로. 여전히도 물가에 내놓은 엄마의 제멋대로인 막내아들로. 그래도 아장아장. 내가 옳다며. 잘도 죽어가고 있다. 온갖 이유와 선택들로 억지스럽게 이 삶을 태우며.












.....

어린 나이부터 엄마가 무언가를 선택해주지 않아서 해왔던 그런 선택들.. 그리고 현상과 행동을 구분할 줄 알아 행동함으로써 자기의 것으로 만들겠다는 그 의지.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나보다. 

조카는 이제 개똥 철학으로 존재의 이유를 물어보는 나이가 되었을 것 같다 아직은 어린가 ㅋㅋ 


'유아인 > 1일 1작은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엄홍식 작은집 - 4.  (0) 2016.04.26
엄홍식 작은집 - 3.  (0) 2016.04.25
엄홍식 작은집 - 1.  (0) 2016.04.23
엄홍식 작은집 - 그렇게  (0) 2016.04.22
엄홍식 작은집 - 부끄러운  (0) 2016.04.21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