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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식 작은집 - 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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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식 작은집 - 5.

LSGO 2016. 4. 27. 08:25

5.


2010.04.14 16:12



 초등학교때 '나의 주장 발표대회'에 나가 입상한적이 있었다. 남북관계에 대한 지극히 초딩다운 견해를 정치인처럼 줄줄외워 배에 힘을 주고 발표하는 웅변 비슷한 대회였는데 팔을 벌리거나 과장된 입모양 같은건 하지 않아도 됐다. 글은 같은 주제로 전국대회에 까지 나갔던 누나가 대신 써 준 것이었고, 나는 거울 앞에서 미간을 찌푸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가장 덜 멍청한 눈빛을 연구했다. 목소리는 충분히 까랑까랑했고, 나름 뱃심도 좋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무슨 말을 지껄였었는지 잘 생각은 나지 않는데, 무튼 꽤나 호소력 있는 발표였고, 결과는 1등이었다.

 부끄럽지는 않았다. 글은 집에가서 써도 좋다는 허용부터가 어처구니없지 않나. 나는 숙제로 대신했던 독후감 대회나 그림대회 같은것들을 다 우습게 여겼다. 책처럼 펼칠수 있는 파란색의 우쭐한 상장을 받는 것은 대단히 간편한 일이었다. 어째서 소원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이해도 없이 통일이 소원인 노래를 부르던 3학년짜리 애들에게 시대의식을 요구하고, 그럴싸한 글을 기대하는 선생들을 멍청하다고도 생각했다. 교과서나 읽어주는 녹음기같은 사람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이 숙제를 걷으며 애들의 학원선생과 형과 누나와 엄마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것은 아닐것이다. 그것을 짐작한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그렇게 믿고싶었고, 확신했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 선생님이 멍청한것 보다는 현실적인게 그나마 덜 슬픈 일이니까


 몇년이 흘렀고, 교복을 입었다. 셔츠 라벨의 차이가 있거나 바지마다 핏이 달랐고, 그런 외양은 무채색의 아이들을 갈라놓는 꽤나 선명하고 편리한 잣대였다. 남들 만큼은 바지를 줄였고 뒤지지 않는 브랜드의 셔츠를 입었다. 나는 어떤 무리에나 낄 수 있는 아이였다. 중간고사 기간엔 시험지를 들고 바지통이 넓은 애들 사이를 바쁘게 옮겨다니며 점수를 매겼고, 점심시간엔 바지 밑단에 지퍼를 단 애들과 담배를 피웠다. 아이들의 사회에서 나는 꽤나 정치적인 인물이었다.

 그때까지도 내 생각에는 변화가 없었다. 멍청하거나, 현실적이거나, 나는 내가 만난 선생님들을 그 두가지로 분류했다. 그 나이에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어른이라곤 부모님이나 친척들 외엔 선생님들 뿐이었으니 내겐 그런 기준은 모든 어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나 마찮가지였다. 어느 쪽이든 속여 넘기기 편하고, 나는 시건방 떨기 좋아하는 조숙한 아이였다.


 학교 근처에는 대단지의 임대 아파트가 자리잡고 있었다. 거기에 사는 키가 작고 눈에 띄게 까무잡잡한 애가 한 반에 있었는데 뒷머리에 새집을 얹고 굳이 맨 앞 줄에 앉아 매일같이 아이들의 비웃음을 샀다. 풍족한 가정 환경이 못 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머리를 감지 못 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것을 온전히 그 애의 지저분한 성격 탓이라고 여겼다. 말 수가 적고, 공부도 못하고, 씻지 않고 학교에 오는 사회 부적격의 아이. 그런것들은 지각없는 중학교 남자애들을 폭도로 만들기에 충분한 요건이다. 그 애는 쉬는시간을 친구들의 심부름을 하거나, 레슬링 상대가 되거나 운이 좋으면 엎드려 있는 것으로 보냈다. 나는 애들과 어울려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다 힐끔힐끔 그 애를 쳐다보는 것으로 자신의 방조를 면책하고 위로했다.

 '난 너에게 아무짓도 하지 않았어, 심지어는 이렇게 널 동정하고 걱정하기도 해.'

 다수에 속하는 것은 어떤 사회에서나 기본적인 안정과 편의를 보장한다. 모두에게 익숙하고 한가로운 시간이 그 아이에게 얼마나 끔찍했을지를 생각면 그것은 이루 말 할 수 없는 편안함이었고, 나는 안심했다.


 그때의 담임음 드물게 멍청하지도, 현실적이지만도 않은 젊은 여자였다. 짓궂은 애들이 "섹스피어! 섹스피어!!" 하고 킥킥거리는 것을 조금도 민망해하지 않고 칠판에 옮겨 적으며 "섹스가 아니고, 셰~익!스피어"라고 설명하는 사람이었는데 나는 이제 막 선생딱지를 붙인 20대의 여자가 그나마 풀어지지 않은 단단한 각오와 우직함을 가지는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라면 내 평가 항목에 또다른 분류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기대했다.

 또 다른 쉬는 시간. 그 애는 반에서 힘 좀 쓴다는 괴팍한 놈의 레슬링 상대가 되어 이리저리 쥐어 터지다 팔이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폭행이라는게 맞겠나. 무튼, 녀석은 119를 부르기도 전에 그 애를 협박했고, 반의 모든 애들이 가담하여 그 일을 은폐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았다. 선생도, 시건방을 떨던 나도 성가신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 애는 멀쩡히 복도를 걷다 넘어져 오른 쪽 팔에 한달이나 깁스를 하고 다닌것 뿐이다. 필기를 대신 해주는 친구도, 밥을 떠벅여 주는 친구도 없었다. 나는 여전히 다수에 속했다.


 이제 와서 내가 중학교때의 그 친구에게 내 방식대로 사과할 수 있다면 저 깊숙히 남은 그나마의 영웅심리 같은 것으로 소수에 파고 들어가 조금은 피곤한 삶의 짐을 지는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한다. 아닌건 알겠는데 딴기 걸어 뭐하겠나. 가끔 사고를 좀 쳤고, 이쯤하니 속 시끄러운 일은 만들고 싶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성가신 일들은 나를 피해갔으면 좋겠고, 이게 현실이다. 지갑은 좀 더 두둑했으면 좋겠고, 더 비싼 옷을 입었으면 좋겠고, 외식이 좀 더 늘었으면 좋겠다. 뭐하자는 짓거린지, 어쩌자는 세상인지. 그런건 모르는게 낫겠고, 어쭙잖은 깨우침은 개나 주라지. 내가 쓰는 글의 반은 나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나마도 반의 반은 삶의 저편으로 동덜어져 방구석만 어지럽힌다. 그런것을 성숙이나 지혜라고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행히 내 평가 항목은 하나 더 늘었다. 멍청하거나, 현실적이거나, '실망스러운' 어른들. 내가 운이 없는건지. 열 일곱에 학교를 그만 둘 때 까지도 나는 드라마에 나오는 영웅같은 선생님은 만나지 못했고, 세상에 나와서도 그런 나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도 그 중 하나에는 충분히 속할만한 사람이 되었다. 이만하면 가장 보통의 삶 아닌가? 내가 내 선생에게 그랬듯이. 스무살의 내가 계속 시를 쓰고, 소년으로 남아있어도 좋겠냐고 허락을 받아야 했던 것 처럼. 누군가는 이 일을 슬퍼하고, 멍청한 놈이라고 나에게 욕을 퍼부어 주었으면 좋겠다. 의지라기엔 이미 무뎌졌고, 도망이라고 갔더니 다시 어느 옥상. 목에 뻘건 스카프를 매고 이것이 거역할 수 없는 나의 운명이라며 번쩍 팔을 들고 보통이 아닌곳으로 뛰어내릴 수 있게.









....

여러모로 많은걸 알아가는 글임..

가장 보통의 존재 엄홍식인 이유

멍청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지만 실망스러운 그 담임선생님

소수에 끼지는 못하더라도 나중에라도 죄책감 같은 것을 가지고 그건 아닌 것이라는 것을 알고 이런 글을 쓴다는것 자체가 참 대단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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