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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홍식 작은집 - 1. 본문

유아인/1일 1작은집

엄홍식 작은집 - 1.

LSGO 2016. 4. 23. 10:55

1.


2009.03.04 20:25



굳이 먼 기억은 아니고, 지금보다 더 괴상한 말들을 중얼거리던 어린애였을때.

그러니까 남들만큼 대가리에 피가 말라가고 첫사랑의 망령에 밤잠을 설치던 그런 어린애였을때.

고통.

썩은지 한참 지난 이빨을 혀 끝으로 후벼파며 나는 고통에 몰두했다.

나는 시린 어금니 틈새에 지난 사람과 거기에 속했던 사람과 그간 내가 빨아 먹은 막대사탕 찌꺼기가 남아 그렇게 썩어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거창하고 시적인 나의 어금니는 오래가지 않아 섬뜩한 아말감으로 때워졌지만 그렇다고 나의 기억들이 동네 구석 치과에서 모두 마감된건 아니다. 물론.


나는 한강 둔치의 난간 위를 걷고 있었다. 그때는 고수부지란 일본식 표현을 썼다.

서강대교. 정확히는 서강대교 북단 아래로 녹이 쓸고 삐걱대는 엉성한 철재 계단이 깊숙히 뻗은 곳이었는데 그곳엔 빗물 펌프장이 있어서 퀴퀴한 냄새와 기괴한 물방울 소리가 진동을 했고 남으로는 밤섬이 솟아 음산함을 더했다. 지금은 환청이었나 싶지만 밤섬 숲에서 바시락대는 소리도 뜨문뜨문 들렸다. 잔디밭 같은건 상상도 할 수 없었고 누구도 그곳에 돗자리를 깔지 않았다. 지나가거나, 되돌아가거나, 그곳은 그냥 빨리 스쳐 지나야하는 불쾌한 길목이었다.

그곳에서, 나의 길은 앞이나 뒤에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한테는 길목이 아니다. 언젠지 모르게 도착해 머무르는 곳이었고, 어디론가 간다면 출발지가 되겠지. 오른쪽, 그리고 왼쪽, 육지로 안착해 다시 철 계단을 긁으며 올라가 초록색 커튼 안에 갇혀 버리거나, 한뼘도 가늠할 수 없는 깊은 어둠 속으로 빠지거나. 나는 두가지 밖에 생각 할 수 없었고, 어느것도 고통스럽지 않은것은 없었다.

오른쪽, 나는 다시 초록색 커튼 속에서 시린 턱을 문지르며 하염없이 밤이 내리기만을 기다린다. 

아직도 그 난간 위를 걷고있다.

그리고 왼쪽, 발 한번 담그지 않았던 그곳이 과연 고통이었을까.






망령 - 혐오스러운 과거의 잔재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아말감 - 약간만 가열하면 무르게 되므로 세공하기 쉽다. 은, 주석, 구리의 아말감은 치과용 충전재로 쓰인다.

고수부지 - 큰물이 날 때만 물에 잠기는 하천 언저리의 터.

서강대교 -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과 마포구 신정동을 잇는 다리. 한강 위에 세워진 다리

밤섬 - 마포구 창전동 · 당인동에 걸쳐 있던 마을로서, 한강 가운데에 있어 밤처럼 생긴 섬인 데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다. 광복 후에는 율도동이라고 하였다. 1968년 밤섬이 폭파됨으로써 주민들은 마포구 창전동으로 옮겨졌다. 밤섬은 현재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조그만 섬으로 되어 있다.








......

처음에 받아적으면서 읽을 때는 이해가 안되서 단어 뜻 적어서 다시 읽었다. 근데 계속 읽게 된다. 왼쪽은 고통이 아니었을까 왜 오른쪽으로 간걸까. 무려 7년 전 그의 고통을 활자로나마 느낀다는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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