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ite Chocolate
엄홍식 작은집 - 6 본문
6
2010.06.23 05:24
촌스러움의 미학과 시대적 가치를 조명한 김봉숙의 어느 교양프로그램을 본적이 있다. 지향점이 같다는 것은 개성의 말살을 초래한다. 허세난 허영같은 말이 유행하고 어느 레이블의 모노그램 가방은 이제 촌스러운 것이 되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던을 쫓아가고 신상이 각광받는 이 시대에 몸빼바지를 입고 다니는 여인의 존재가 그저 다른 형태의 반발로 묵살당하지 않은 것은 다르다는 것이 이 시대의 대류 속에서 뿜어내는 분명한 존재감 때문일 것이다.
누구나 어떤 시절에 한번쯤은 특별한 삶을 꿈꾼다. 혹은 평생을 그 환상을 쫓는데 할애하기도 한다. 특별한 삶을 보통의 인간으로 살아내거나, 보통의 삶을 특별한 인간으로 영위하거나. 나는 멍청한 선택의 기로에서 그것들을 충분히 고민할 만한 세게를 살고있다. 직업이란 것은 어떻고, 여기의 눈들은 또 어떠한가. 나는 굉장한 행운아라는 사실을 말해두고 싶다. 혹은 그 반대일 수 있다는 것도.
중학교때. 아직은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용돈을 타 쓰던 그때에 무리와의 분리를 꾀하며 나는 특별한 것에 환장한 다를리 없는 또래의 '자아찾기' 숙제에 열중했다. 지긋지긋하게 떠들어댄 지난 시절의 별나던 내 품성에 대해 다른 말로 구태여 강조하지는 않겠다. 무튼, 그런 나에게 엄마는 평범이 곧 비범이라고 말하곤 했고, 특별한 것이 그저 다른것인지 보다 나은 것인지 튀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 조차 분간하지 못하던 나에게 엄마의 역설(어떤 의미의 것이든)이 와닿을리 만무했다. 심지어 나는 나의 어머니를 비참한 어른이라고 여기기에 이른다. 침을 좀 뱉었다. 뒤틀린 눈으로 바라본 기성은 같은 먹이를 쫓고 안되면 서로를 물어 뜯고 그러면서도 무리지어 살아가는 좀비같은 존재들이었다. 연민을 가질 정도로 건방지지는 않았다. 나는 꽤나 강한 항체를 지녔고, 반발이거나 도망이거나 더욱 속도를 높혀 벽을 쌓고 선을 긋고 멀어지는 것에 열중했다. 나와 비슷한, 나를 침범하는, 내가 속해있는 모든것들로 부터.
고향의 어떤 여인은 인도에서 자아를 찾아왔고, 애정해 마지않는 나의 친구들은 시내버스를 두시간을 타고 그것을 찾아 다녔단다. 물론 그 말들의 절반은 농일것이고, 절반은 감추지 못할 진실일 것이다. 없는 자아를 굳이 찾으려니 그것이 억지스레 만들어 지기도 한다. 무엇이라도 나쁘지는 않다.
'완전'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자아란 말의 사전적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 이십대에 들어 두어번쯤 있었던것 같다. 완전한 분리를 겪으며 자아는 지독히도 선명해져 간다. 텅 빈 우주를 떠다니는 먼지같은 존재감.
그것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레드카펫을 걸으며 입술을 찢거나 각광 속에서 손을 흔드는 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에 앞서 나는 타의 반 자의 반의 반. '격리'를 체험한다. 매일 밤 허무와 외로움의 고통이 절망으로 벽을 타올라 커튼을 열어 젖혔다. 그리고 머지 않아 죽지 않고도 그것을 견디는 법을 터득했다. 인사를 건내고 친구라고 부르는 것. '안녕? 오늘도 왔구나.' 하고 그것이 내 목을 조르기 전에 내가 먼저 그것을 반기는 것. 절망이 나를 덮치기 전에 내가 먼저 그것을 찾아내는 것.
겉치레가 요란해질 수록 자아와 근본에 대한 나의 집착은 집요한 탐닉으로 변해간다. 외부와 개인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꽤나 비현실적이고, 보다 더 영민하게 현실을 통찰하며, 의외의 멍청함을 지닌다.
도무지 평범해질 재간이 없는 나에게 이미 멀어진 그 자리에 눌러 앉을 만한 구실이 있었다면 글을 쓰고, 연기를 하고, 애 어른 처럼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자아의 성립이라기 보단 자의식의 과잉이란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무튼 나는 함정에 빠졌었고, 지극히 평범한 무리 속에서 이탈하지 않고 자아를 지키며 존재감을 각인하고 이질감을 주지 않는 존재가 되는것. 이것은 혹독한 연습이다. 나는 그 말의 편의성을 충분히 이해한다.
우연히도 두어번. (그녀에게 이것이 건방이 아니라면) 나의 과거를 걷는 한 소녀를 만난다. 그녀에게 어쭙잖은 몇개의 추억을 늘어 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충고란것이 얼마나 비극적인 클리셰인지를 통감한 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떤 말을 예쁘게 리본 묶어 건내어도 그녀에게 나는 기성이고, 끔찍한 좀비들중 하나이리라.
가끔 그녀의 단편들을 훔쳐보며 미소를 짓곤 한다. 소녀는 열 아홉이 되었다. 성도착증 환자 같은 것으로 오해는 마시라. 눈에 띄게 무리에서 분리되고 한창 그것의 특별함에 도취되어 있다 깨어나 보니 말라버린 우물에 갇힌것 같은 외로운 고통을 느껴야할 그녀에게 손 내밀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지 않겠다는 모성어린 액션이다. 이제와 내가 엄마의 말을 상기하는 것은 그녀의 혜안과 현명함을 인정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롯이 나의 고통을 염려하고 그것에 무너져내린 따스하고 질긴 모성을 절반쯤은 이해하며 살고있다.
획기적인 소녀. 깊숙한 절망 속에서 까발리고 까발려도 다 뽐내지 못 할 멍청한 우쭐함에 행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견디기 힘든 존재양식을 수용하고도 넘나들 만한 커다란 문을 가지길 바란다. 그곳에서도 세계를 적시할 투명하고 큰 창을 가지기를 바란다.
실패하지 않은채로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아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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